해바라기, 초록물고기, 박하사탕, 파이란, 밀양. by 방도니




지금 사는 집 옆 마당에 두 세 그루(?)의 해바라기가 있다. 지금은 겨울이라 본래 해바라기 꽃 처럼 큰 노란색의 접시 모양은 아니다. 그냥 축 늘어진 좀 기다란 꽃 줄기 마냥 불안하게 서 있다. 잠시 바람을 쐬러 옆 마당에 나왔다가 그 해바라기를 바라보았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문득 예전에 본 <해바라기>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영화의 초반 장면이 생각이 난다. 10년만에 감옥에서 출소한 오태식(김래원)이 불안한듯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주머니 속에서 수첩을 꺼내는 장면. 수첩에는 '술마시지 않는다.' '싸우지 않는다.' '울지 않는다.' 라는 유치하지만 비장한 그리고 태식의 과거를 짐작케 하는 바람이 써 있다. 태식은 10년 동안 자신의 지난 실수를 후회하고 또 후회하며, 다짐하고 또 다짐했던 것이다.   '술마시지 않는다.' '싸우지 않는다.' '울지 않는다.' 영화의 이야기는 간단하다. 그런 태식이 사회에 나와 희망을 안고 살아가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되는 등, 환경이 따라주질 않는다. 결국 태식은 10년 간 후회했던 그 기억을 그 실수를 반복한다.

 

사실 이렇게 간단히 쓸만한 줄거리는 아니지만 난 그저 태식의 삶에 집중하게 됐다. 10년간의 고통의 시간 속에서 태식은 스스로를 증오하기도 하고 불쌍히 여기기도 하고, 때로는 수백번이고 스스로를 죽였을 것이다. 그리고는 작은 희망을 안고 그 작은 수첩에 바람들을 적어가며 하루 하루 버텼을 것이다. 그리고 사회에 나와서. 어머니라 부르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태식은 결국 이성을 잃는다. 이성을 잃었다기 보다, 스스로 이성의 끊을 놓는다. 그리고 10년간 그렇게 참고, 견뎌왔던 시간들, 후회하고, 또 후회했던 그 시간들을 어쩔 수 없이 현재의 비극과 사라져 버린 희망 없는 현실 앞에서 반복하고 만다.

 


태식의 모습을 보며 한없이 불완전한 인간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태식과 함께 막동, 영호, 강재, 신애가 떠올랐다.

막동은 <초록물고기>에서의 한석규, 영호는 <박하사탕>에서의 설경구, 강재는 <파이란>에서의 최민식, 신애는 <밀양>에서의 전도연이다. 태식과 막동, 영호, 강재, 신애는 각기 다른 이야기의 주인공들이지만 이들의 삶은 극히 주변적이면서도 극단적이다. <해바라기>의 첫장면과 마지막 장면, <초록물고기>에서의 막동의 공중전화신, <박하사탕>에서의 영호의 자살장면, <파이란>에서의 강재의 눈물, <밀양>에서의 신애의 기도신은 모두 주변부의 인물들이, 그들이 겪는 극단적 비극의 현실에 대한 반응이자 몸부림이다.


 


비록 영화이지만, 태식과 막동, 영호, 강재, 신애는 현실에서의 운명 앞에 나약한 그리고 한없이 무능력한 그래서 때로는 신에게 화가날 만큼 초라한 인간의 모습이었다. 조그마한 희망의 부재 앞에서 혹은 비극적 현실 앞에서, 혼란 스러운 청춘과 정립되지 않은 가치관 앞에서, 인간이란 존재는 기댈만한 가치가 없는 존재라는 걸 깨닫는 순간 앞에서의 인간의 모습이다. 태식은 혀를 깨물어 피가나올 정도의 후회 뒤에 나온 그 작고, 온전한 다짐을 깰 수밖에 없는 현실 앞에서, 그리고 그렇게 연약하게 다시 실수를 반복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불완전함 앞에서 그저 이성을 놓은채 복수를, 스스로 죽음을 선택 할수밖에 없었다. 막동 역시 작은 희망을 안고, 시작하는 삶 속에서 비극적 현실로 이미 진입해온 스스로의 삶에 대한 후회와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거대한 벽 앞에서 그저 눈물과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영호 또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주변부이지만 때로는 작은 주체자로서, 순수했던 청춘의 시간이 점점 더러워지고 추악해지는 스스로의 삶을 뒤돌아 보며, 그저 과거로 되돌아 가고자 하는 마음과 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강재는 그의 가슴 안에 있던 사랑과 연민과 따듯함을 모른채 살아왔던 지난 시간을 후회하고, 그럴 수밖에 없던 자신의 인생의 비참함을 그저 눈물로 승화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신애는 극단적이고 비극적인 자신의 현실 앞에서 신을 택했지만, 그 신에게 마저 배신을 당했다 느끼고, 미쳐버리고 만다. 신애의 기도신은 인간이 얼마나 작고, 무능한 존재인지 여실히 보여준다.  
 

 

 

태식과 막동, 영호, 강재 그리고 신애를 보며 그토록 불완전한, 무능한 인간의 모습을 본다. 상상할 수 있는 비극적 현실의 수준 앞에서 우리는 그저 울분과 농도 짙은 슬픔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으며, 이성의 끊을 놓거나 그것마저 견딜 수 없을 때에는 목숨을 끊기도 한다. 현실이 주는 고통이 극단적으로 다가올 때에 그렇게 포기하는 삶에 대해 우리는 어느 정도의 자리를 차지 할 수 있을까. 내 삶의 주체는 나라고, 내가 삶의 주인공이라고 얘기하는 많은 사람들 역시 비극적 현실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그런 것들 뿐이다. 때로 목숨을 끊는 것이 스스로의 삶에 대한 최대한의 주체적 행동이라 말하는 것은 정말 우습다. 그것은 삶에 대한 주체적 실천이 아니라 본래의 불완전하고 완벽하지 못한, 무능한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불완전한 행동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삶에 대해 당당한가.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그들의 삶에 대해 자신 있어 하는가. 때때로 그 자신감은 이성이 되기도 하고, 지식이 되기도 하며, 가족이 되기도 하고, 서로간의 사랑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무지에서 나오기도 한다. 인간은 비극적 극단의 크기와 비례하게 변하지 않는다. 비극적 극단의 크기에 상관없이 우리는 미치기도 하고, 실성하기도 하고, 죽음을 선택하기도 한다. 이것이 인간이다. 

 

인간에 대한 회의와 불완전함을 인식하는 것은 그나마 그 불완전함을 극복할 수 있는 길로 나아갈 수 있게 이끌어 준다. 그게 첫걸음이다. 불완전함에 대한 인식.

 

비록 영화라는 인간의 창작물이지만, 영화를 통해 새삼 인간의 근원적 불완전함과 비참함을 돌아보게 되었고,

영화의 결말과는 다른 내 삶의 다음 과정을 기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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